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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12년 4월 총선을 바라보며

 

행정구역통합의 주범인 김학송 국회의원과 새누리당을 반드시 심판한다는 목표를 진해지역의 시민단체들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이르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민단체들과 시의원들이 모여 진해시민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어느 때보다 가장 확률이 높은 절호의 기회였기에 야권후보를 단일화하여 1;1 구도로 만들어 승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2011년 하반기에 진해지역의 민심은 김학송 국회의원에 매우 냉담했습니다. 그 이유는 행정구역통합이 진해지역의 상권을 몰락시키고, 전월세값의 급격한 인상, 공공요금 인상등의 이유로 서민가계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창원중심으로 진행되다보니 진해의 정체성의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진해주민의 의사를 묻지 않고 김학송 국회의원과 한나라당의 전횡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민심은 싸늘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진해를 창원에 팔아버린 세력들을 심판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제기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해지역의 민심이 확산되기까지는 진해지역의 시민단체들의 노력이 상당부분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동안 진해지역의 시민단체들은 통합의 후유증과 각종 진해지역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이슈화시키며, 문제제기를 하였고, 2011년 하반기부터는 진해시되찾기운동을 본격화했기 때문입니다. 즉, 야권이 총선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데, 시민단체들의 노력이 컸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야권의 모든 후보들은 진해시를 되찾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입니다. 이는 시민단체들의 운동을 야권후보들이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것이고, 이 공약이 진해주민들에게 크나큰 파급력을 가져다 준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2011년 12월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자, 민주통합당 예비후보 4명, 무소속 예비후보 4명이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1월에는 김병로 전시장이 민주통합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등록하였고, 통합진보당에서도 후보를 내어 야권의 예비후보가 총 10명이나 된 것입니다. 야권후보가 이렇게 많았던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2008년 총선에는 한나라당, 가정평화당, 무소속 3명의 후보에 불과했었던 경우를 보아도 2012년 총선에는 후보들의 홍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후보들이 나서게 된 것은 야권단일후보가 된다면 그 어느때보다도 당선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2011년 12월의 상황을 보면 김병로 전시장의 입장이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예비후보 등록도 하지 않았고, 출마하겠다는 입장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애초부터 김병로 전시장이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다면, 상당부분 예비후보들이 줄었을 것입니다. 김병로 전시장이 출마의사를 밝히지 않게 되어, 대부분 인지도가 비슷한 후보들이었기에 예비후보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하기에 충분히 경쟁을 할 수 있다고 계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보의 난립으로 단일화가 더욱 어려워졌는 데,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 중의 하나가 김병로 후보의 확실한 입장표명이 늦었다는 것이고, 이는 나중에 김병로 후보에게도 악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2012년 2월에 들어서자 민주통합당의 경선이 진해지역의 야권후보단일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1월까지만 해도 진해지역의 민주통합당 예비후보 4명은 2월안에 단일화하기로 합의하였고, 경남도당이나 중앙당에도 협의를 일정정도 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이 경선룰을 정하고, 모든 지역에 적용하자 진해지역 민주당 예비후보들의 합의사항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민주통합당이 중앙당의 일정에 따르다보니 민주당 진해구 후보의 결정이 계속 지연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민주당의 컷오프에 반발하여 탈당후 김하용 후보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게 되다보니 단일화 국면은 더욱 어려워 진 적입니다. 더욱이 민주당 후보가 정해지지 않으니 단일화 과정이 민주당의 결정이후로 계속 밀리게 된 것입니다. 애초 민주당 예비후보들의 합의안대로 단일화를 했다면, 민주당 후보도 2월 안에 결정되었을 것이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이춘모 당시 진해시민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지역을 무시한 민주당의 오만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3월이 들어서자 야권후보단일화 과정은 점입가경이었습니다. 2011년 11월만해도 일부 무소속후보를 제외한 전 후보들이 함께 모여 후보단일화를 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하며 시민들에게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3월이 되자 후보들간의 신경전은 계속되었습니다. 2011년 시민들과의 약속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으로 단일화가 되지 않으면 경선자체를 회피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비방과 신경전 속에서 불과 총선 3일을 앞두고 단일화가 되었으며, 이마저도 일부 무소속 후보들의 불참으로 완전한 단일화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총선 3일전의 단일화는 진해시민들에게 극심한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다지 단일화 과정이 순조롭지 못하다보니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에도 한계가 분명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새누리당의 상황은 야권의 상황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새누리당 예비후보들은 컷오프를 당해도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김학송 국회의원도 탈락했지만 불복하지 않고 승복했습니다. 새누리당은 김학송 국회의원의 여론이 좋지 않자,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김성찬 후보로 공천하였고, 일사분란하게 선거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한마디로 새누리당은 공천결과에 깨끗이 승복하였지만, 야권에서는 승복하는 문화가 결여된 것입니다.

 

진해시민후보로 최종 결정된 김병로 전시장의 행보도 상당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김병로 후보는 후보등록 초기부터 꾸준히 건강이상설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예비후보 기간동안 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한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소문은 더욱 확산된 것입니다. 또한 행사에만 가서 얼굴을 내밀고 비선조직을 활용한 선거운동은 타 예비후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김병로 후보가 처음부터 타 후보들과 같이 거리에서 선거운동을 하면서 동질감을 형성하고, 거리를 좁혀 나갔다면 후보단일화도 수월했을 것이며, 건강이상설도 불식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병로 후보는 이러한 운동방식을 버리고, 비선조직을 활용한 선거에 중심을 둔 것이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2012년 총선을 보면 야권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좋은 환경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거였지만, 야권 후보들의 이전투구로 말미암아 패배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하겠다고 2011년 11월에 모두 모여 사이좋게 기자회견을 했던 사람들은 2012년 4월 11일 총선이 끝나자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서로를 고발하는 등의 모습으로 탈바꿈된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후보단일화를 하겠다고 약속할 당시만 해도 희망이 뵈는 듯 했지만, 그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뀐 야권과 시민단체들의 참패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