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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가면 크리스마스라 하여 화사한 트리와 온갖 선물들이 장식하고 있습니다.

또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라고 문자도 많이 오고 온갖 행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성탄예배를 드리지만,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는 교단에서는 성탄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탄절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니고, 인간들이 지어낸 날이기에 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탄절인 12월 25일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날이기에 이단이라 의심받는 교파들의 주장은 틀린말이 아니고, 저도 그 취지에는 동감합니다.


성탄절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성탄절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날이 아닌 오랫동안 로마에서 숭배한 태양신의 축일로 지정된 날이었습니다. 

당시 농경문화였던 로마는 12월  21일에서 31일 까지 ‘사르투날리아’라는 축제를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 하여 가장 특별한 날이었으며, 

태양신인 미트라의 축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농경문화는 유목문화와 달리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속에는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귀족과 노예 등의 신분이 뚜렷한 사회이며, 그 대표적인 나라가 로마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정작 본인의 생일은 어처구니 없이 차별과 소외를 정당화했던 태양신의 축제일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부터 이제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은 서서히 사라지고 예수의 포장위에 로마 자본주의 신들의 사고를 실은 종교가 되었습니다. 굳이 성탄을 설명하자면 자본자의가 만든 축제의 날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박해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다보니 초기 기독교에서는 종말론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종교가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는 이유는 기존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대치되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체제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위협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계속해서 로마체제에 위협적이지 못했습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로마체제를 인정하고 순응하면서 적응하였습니다. 

그렇게 권력과 공생하면서 로마로부터 기독교는 공인을 받았고, 마침내 국교까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그리고 지금은 성탄절이 하나의 자본주의 축제가 되었고,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는 희망이 아닌

더욱 절망감을 안기는 날이 되었습니.


성탄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 마리아 등을 보면 모두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성화나 영화에서 주로 나오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이 백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백인입니다. 하지만 과연 유대민족이 백인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진을 예수님의 모습에 가깝다고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2000년전 당시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는 셈족의 유골분석을 통한 모습을 재현하니

아래의 사진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모습이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기에 머리도 길지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피부색입니다. 

한마디로 2000년전 유대민족은 백인이 아니라 오히려 동양인과 흑인사이의 중간지대 피부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리차드 니브라는 전 맨체스터 교수가 복원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예수님의 실제모습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남자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예수님이 위의 사진처럼 멋있는 백인으로만 생각했을까요. 

그건 당시 유럽의 백인 화가들의 입장에서 당시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유색민족의 모습을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백인이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얼마전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여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2차대전 후 미,영국 등의 강대국이 갑자기 현지인들을 내쫓고 세운 나라입니다.

2000년전에 멸망한 나라이다보니 유대민족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단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지요.

그러다보니 유대민족을 독립시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백인들입니다.

혈통적으로 유대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데, 이들의 옛 땅을 찾아 독립시킨다는 것 자체가 강도짓과 다름없는 일인 것입니다.
참고로 사람들이 종종 유대민족은 참 머리가 좋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유대민족은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입니다.

'유대민족이 아니라 유대교도들은 머리가 좋아'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정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탄생이야기를 보면 동방박사, 목자들, 말구유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반긴 자들은 동방박사와 목자들이죠. 이들의 신분은 어떨까요. 

동방박사는 말이 박사이지, 기존 세력으로부터 밀려나 세상을 등지고 별을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싶은 사람들이고, 

목자들은 성전의 예물로 쓰일 짐승들을 지키는 자들로 이들의 신분은 동물 값어치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간절히 원하던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당시 헤롯왕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원하던 인물의 탄생을 반드시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여물통에서 태어나신 것이지요. 

결국 우리의 밥이 되신다는 의미, 곧 희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방박사로부터는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예물을 받았는데, 황금은 왕을, 유향은 제사장을, 몰약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예물의 담긴 의미는 기존의 왕과 기득원 세력인 제사장의 교체를 의미하고,

그 결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미리 예측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했을 때, 예언자 사가랴는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이 예언은 제가 아주 마음에 새기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 아기는 누군가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의 표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서  있는 사람들을 쓰러뜨릴 것이고, 그 서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세력이니 그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민중의 소리를 보니 예수님은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인데, 다소 성서 인용구는 적절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고, 첫 말씀은 희년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희년은 50년마다 돌아오는 해로 이 해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하는 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있지만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첫 회당설교 제목이 희년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과연 부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좋아할까요. 당연히 싫어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상당히 심한 독설을 퍼부우는 것을 성서에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 부자들에 화가있나니'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이 성서구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아쉬움을 남깁니다. 

부자는 하나님나라에 못 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쑴인 데, 가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도 사용하지 말라고 말리더군요. 

아직도 20여년전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부자를 나쁘게만 보지 말라고 하는 데, 저는 그게 안 됩니다. 

아마도 위 말씀때문이고, 굳이 위 말씀을 확대해서 사람들 편한대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아침 6시에 나와서 일을 한 일꾼이나 오후 3시쯤에 와서 일한 일꾼에게 똑 같이 1데나리온을 줍니다. 

1데나리온은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이라고 합니다. 

일찍 오든 늦게 오든 그 사람이 하루를 살아야 하기에 1데나리온씩 똑같이 주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복음서 곳곳에 있지만,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10월 말경 경남도민일보에서 

전의홍의 바튼소리 코너에서 종교인 과세의 정당성을 지적하면서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종교인 과세의 정당성을 부여하더군요.

 그런데 이 구절과 종교인 과세는 관련이 없습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는 보다 성서의 의미를 검증하고 논평했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점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말은 강용석도 예전에 썰전에서 인용하더군요. 그 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종교인과세를 하면  개신교의 목사의 득실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기획재정부가 밝힌 종교인의 소득수준은 96%가 4천만원이하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과세를 하는 종교인은 4%에 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에서 걷을 수 있는 세수는 10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기획재정부는 비교적 낮게 잡은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300억원 정도는 세수확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300억원 정도의 세수가 확보된다해도 전체 종교인의 10%미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90%이상의 종교인들은 과세를 할 만큼의 수입도 되지 못하니 종교인과세와는 별 상관이 없고, 

근로소득자가 되어 근로장려금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근로장려금은 1,000억원 정도 지출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종교인 과세를 하면 10%미만의 종교인에게 300억원의 세금을 받을 수 있고, 

90%의 종교인들은 1,000억원 정도의 근로장려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 종교인의 입장에서는 700억원 정도의 이득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보수교단들 중심으로 종교인 과세를 격렬히 반대하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종교인 과세는 사실 10%미만의 대형교회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세안의 통과되면 교회수입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의 회계는 사실 몇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그 내역도 특정인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투명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형교회들이 종교인 과세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즉, 대형교회들이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종교인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염려되어 과세를 거부하는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90%이상의 종교인들이 손해를 보는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각각의 교단에 속한 교회들을 보면 대부분의 교회가 열악한 상태인지만, 

그 수장에 대형교회 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보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90%의 소득이 낮은 종교인들은 대형교회에 다소 의존적이다보니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는 구조도 문제인 것입니다.


종교인 과세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OECD국가 중에 한국만이 종교인 과세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형교회는 이중과세이니 하나님의 것이니 하는 핑계를 대지 말고, 떳떳하게 종교인 과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남도민일보에서 인용한 성서구절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로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것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면 그 자리에서 로마군인에게 잡혀 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에 어긋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의도를 알고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문구 자체만으로는 트집을 잡기 어려운 난해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가이사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즉,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훗날에 이 발언으로 하여 고소를 당하고 결국 로마 총독부에 잡혀가 십자가 형을 당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에 세금을 내지 말라고 했다면서 고소를 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 문제만으로 고소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로 충분히 로마에 대한 반역죄를 만들 수 있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세력에게는 세금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목숨을 유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세력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십자가 형을 당한 것입니다.


 성탄에 대한 포스팅을 하다가 여러갈래로 빠져 포스팅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광대한 내용을 이 포스팅에 압축하여 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탄을 맞이하여 이거 하나는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정신은 너무나 왜곡되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대 자본과 권력에 맞서 약한자를 보호해야 할 기독교가 이들과 결탁하고 이들을 박해하는 데 동참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대형교회의 횡포는 무늬만 예수이고 십자가이지, 

진정으로 그 안에는 십자가가 사라지고 로마군의 총독부가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로마군의 총독부를 예수라 알고 있으니 참으로 엉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심정을 담은 안치환의 민중의 아버지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