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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가 진해요새사령부의 보존 여부에 대해 조만간 결정한다고 합니다.

창원시는 최근 보존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 

전문가 자문을 통해 이번주내에 결정한다고 합니다.

진해요새사령부는 역사적의미가 있기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많았는 데,

창원시가 개발논리에 의해 철거할 것이 아니라 보존하여 

후세에게 역사적 교육의 장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다행히 2016년 8월 3일 창원시는 근대건축물로 지정고시하여 보존하기로 결정함)


그럼 진해요새사령부는 무엇이기에 보존해야 한다고 할까요.

오늘은 진해요새사령부와 관련된 어두운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청나라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어 만주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만주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행사하였고, 

일본은 요동반도, 대련, 뤼순 등지를 러시아에게 내주게 됩니다. 

청과의 전쟁으로 얻은 땅을 러시아에게 내주었으니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이후 일본은 10년동안 러시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전쟁준비를 하였습니다.


1903년 10월 경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일본은 제일 먼저 수심이 깊어 해군이 활동하기 좋은 전남 신안군 옥도에 가(仮;임시)근거지를 만들고 

규슈까지 해저 케이블을 깔고 적함이 다니지 못하게 수뢰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인접한 진해만에도 방비대(사령부)를 건설하고 거제도 송진포에 가근거지를 세웠습니다.


또한 육군은 해군을 보호하기 위해 거제도 외양포와 저도에 포대를 만들었고.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저도의 경우 민간인이나 취재진의 접근은 막지만 군인이나 가족들은 콘도 등을 자유롭게 이용합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저도에서 휴가를 보내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해군은 옥도와 진해만, 육군은 외양포와 저도에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1904년 2월에 일본이 제물포에서 러시아 전함을 공격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당시 러시아 함대는 뤼순항에 있었고 

일본함대가 이곳을 공격하다가 8천명이 죽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었습니다. 

장기전 과정에서 옥도는 일본 해군이 휴식을 취하고 정비도 하는 전진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1905년 1월 초에 러시아 뤼순 함대를 함락시킵니다.


이후 2월부터 5월까지 일본은 3천명을 동원하여 각종 장비와 병력을 진해만에 집결시킵니다. 

진해만은 수심이 깊은 내해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러시아는 뤼순이 함락되자 유럽에 있던 발틱함대를 불러왔는데 

일본연합함대는 진해만에 숨어있다가 이곳을 지나던 발틱함대를 쓰시마와 협공하여 궤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옥도와 진해만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함선 침몰 19척, 빼앗긴 함선 15척, 병원선 억류 2척, 전사자 5000여 명, 

사령관을 비롯한 포로 6160명이었으며 48척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귀항한 것은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뿐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측의 손실은 수뢰정 3척과 700명 가까운 사상자뿐이어서 

피해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용산에 육군사령부를, 진해만 외양포에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세웠습니다. 

이후 1911년에 진해만요새사령부가 마산으로 이전하여 마산요새사령부라 불리었으며, 

1914년에는 마산요새사령부를 지금의 진해 여좌동에 요새 사령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진해요새사령부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의병들을 진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진해요새사령부에는 어둡고 잊고 싶은 과거이지만, 

이를 기억하여 후손들에게 알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해요새사령부는 보존되어 후손들에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어가는 것,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