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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진해주민들은 일제군부의 신시가지 조성으로 인해 땅을 빼앗기고 경화동으로 강제이주 당합니다.
그리고 경화동으로 이주당한 주민들은 신시사지 조성을 위해 노동력을 일제에 착취당하게 됩니다.
해방 후 일제가 쫓겨난 후 예전에 빼앗긴 땅이 다시 진해주민들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니 다른 곳에 비헤 진해주민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일감정이 강햇던 옛 일본해군의 도시에 대한민국의 해군을 창설할려는 이가 바로 손원일입니다.
손원일로서는 진해주민들의 해군 창설에 대한 강한 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방문은 참으로 해군 창설에 대한 명분과 실리를 진해주민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때마침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의 삼남지방 방문계획이 잡혔고,
손원일이 초청하자 김구선생은 삼남지방의 첫방문지로 진해를 선택합니다.
진해를 방문한 백범 김구선생은 진해 주요인사들을 만났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비문과 유묵을 남기게 됩니다.
(지난 8월 21일 재일교포 김청정(78)씨가 창원시에 기증한 김구 선생의 친필로서 문화재청 동산문화재 분과위원의 자문에 따르면, 이 유묵은 ‘丙戌 孟冬’의 내용으로 보아 김구 선생이 70세 되던 1946년 10월에 쓴 글로, 내용은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지은 憂國詩인 ‘陣中吟’ 8구 중에서 제2구(‘誓海魚龍動(서해어용동)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아준다)에 해당하는 글귀라고 합니다..
해군사관학교 입구 남원로터리에 있는 ‘백범 김구 친필시비’와는 동일한 서체이나 친필시비 측면에 있는
음각문 ‘大韓民國二十九年 八月十五日金九謹題’의 내용을 보면 시비의 글은
1947년 8월 15일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앞구절인 ‘誓海魚龍動(서해어용동 )이란 글귀는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 김구 선생은 손원일과 어떤 관계이길래 진해를 삼남지역에서 첫 방문지로 선택했을까요.
손원일은 부친 손정도 감리교 목사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부친이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분이다 보니
상하이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원래는 의과대학을 다닐려고 했는 데, 제복입은 해군 모습에 반해 상하이 중앙대학교 항해과에 짆학했다고 합니다. 대학 졸업 뒤 외국 항해사에 다니다가 1934년 개성에 있는 누나를 방문했다가 상하이 임시정부 비밀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잡입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간 고문과 옥고를 치룬 후 무혐의로 풀려나 다시 중국으로 가서 동화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손정도 감리교 목사와 손원일 초대해군참모총장)
여기까지 보면 손원일의 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짐작가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손원일은 독립운동의 전면에 선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아마도 보급책이나 자금조달 등의 측면지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측면지원을 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본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손원일의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손원일의 부친인 손정도 감리교 목사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와 함께 핵심인사였다는 사실입니다.
손정도 목사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추진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살림꾼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자금조달에도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또한 1921년에는 한국노병회를 김구, 여운형 등과 함께 조직하였습니다.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고난의 길을 걷게 되고,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나 액목현 교회, 대강자 교회, 심지어는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갑니다.
바로 이 무렵에 만주에서 손정도 감리교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 그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과의 인연은 김일성 회고록 7권 1992년에 출간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1992년에는 제가 파주 탄포천이란 곳에서 철책 근무를 하던 군생활시기였습니다.
저는 이 당시에 북녁에서 방송되는 김일성 회고록을 매우 듣게 되었는데,
그 회고록에서 연일 손정도 목사에 대한 일화를 북한의 대남방송에서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 반복해서 들어 외우다시피 할 정도였던 추억이 있습니다.
이 회고록 2권 1장에는 손정도 목사란 제목하에 소상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고 있는 교회에 김일성이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게 됩니다.
김일성은 길림에서 사회주의 지향하는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조직하여 그 세가 확대되자,
중국공안당국에 붙잡혀 7달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 손정도 목사가 옥바라지는 물론 뇌물까지 관리들에게 주어 석방시킵니다.
그 후 손정도 목사는 일본군경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김일성을 피신시키는 데,
만일 일본군경에 잡혔으면 10년형 정도는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님은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로 평가하였습니다.
또한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 김일성이 형제, 자매처럼 지냈다고 하니,
손원일도 김일성을 유년시절에 아주 형제처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손정도 감리교 목사는 과로와 격무, 스트레스, 고문 후유증 등으로 말미암아
1931년 1월 저녁식사 중 피를 토해 병원에 옮겼으나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습니다.
손정도 감리교 목사의 아들인 손원일은 아버지와 김구선생과의 인연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후에 백범 김구선생의 임시정부를 측면지원하였기에 가까운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백범 김구 선생은 손원일의 요청에 혼쾌히 응하여 진해를 삼남지역 첫 방문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흔히 손원일 제독이란 칭호를 많이 사용하는 데, 제독이란 칭호는 일제식 칭호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손원일은 중국에서 항해공부를 한 인물로 해군에 관심이 많았고,
해군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자신의 사비와 모금으로 모은 돈으로 전투함인 백두산호를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해병병단을 창설하였고, 이는 1948년 9월 정식해군으로 발족되었으니 해군의 창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더욱 독특한 것은 군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 손원일이 해군을 창설했다는 것과
당시 군부를 친일파가 장악한 사례에 비춰보면
독립운동가 후손이며, 출신인 인물이 해군을 창설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손원일과의 인연으로 김구선생은 북원로타리에 시비를 남겼지만, 이 시비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김구 암살지시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승만이 이순신장군 동상 제막식에 방문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김구선생의 시비를 보게 되고,
그 즉시 "진해는 아직도 김구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죠"라는 한 마디에
당시 공무원들은 부랴부랴 정신없이 김구선생의 시비를 뽑아 진해역 창고에 방치하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때 김구 선생을 존경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김구 선생의 시비는 끝내 이승만이 하야하고
4.19혁명 이후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오고 난 이후에도
원래 있었던 북원로타리가 아닌 남원로타리로 이전하여 옮겨졌으니 무언가 개운치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남원로타리에 옮겨진 김구 선생의 시비는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진해역 창고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누군가가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의심하는 시각도 많습니다.
그래서 전점석 전창원YMCA 총장은 훼손한 인물을 찾기 위해 공개수배를 한 상태이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원로타리에 가면 훼손된 김구 시비가 한복판에 있습니다.
하지만 김구 시비가 왜 이렇게 고난의 길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김구를 암살한 것도 부족하여 김구의 흔적까지 지울려고 했던 이승만의 만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과정도 소상히 김구시비 옆에 설명하는 안내판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해방 후 김구를 존경했던 진해주민들이 많았다는 것은 진해시비나 유묵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김구 선생의 시비훼손은 이승만의 진해주민에 대한 모독일 것입니다.
이런 자를 대한민국의 창시자니 국부라고 추앙할 수 있을까요.
김구 시비를 보면서 지난 권력자의 만행을 알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김구 시비 훼손에 대한 역사를 분명히남원로타리 시비 옆에 기록으로 남기는 일,
이제 우리 후손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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