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나라에 내가 내 발로 왔다면야 고향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무도한 싸움 때문에 붙잡혀 끌려온 희생자예요. 아무리 애정을 베풀어준다 하더라도 잡혀 온 사람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오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원수의 나라일뿐이지요. 이 나라를 어떻게 고향이라 생각할 수 있겠어요.”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진해 웅천왜성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소녀 ‘수란’은 모리 레이코(森禮子)의 소설 <삼채의 여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친 실제 인물 ‘오타 줄리아’(Ota Julia)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밀고 올라갔던 왜군은 조·명 연합군과 의병에 밀려 1년만에 부산 등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후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5월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시니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해에 성을 쌓고 주둔할 것을 명령했다.
진해는 한·일 교류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부산-진해-마산-거제 일대와 일본 규슈 북부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최단거리이고,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도 쓰시마·이키 등 사이에 있는 섬을 징검다리 삼아 보름이면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택에 진해는 한·일 교류의 요충지 구실을 했지만, 동시에 왜구의 노략질에 숱한 피해를 당했다. 이 때문에 진해는 일찌감치 한·일 교역의 중심지이자 군항으로 발달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전쟁 기간 내내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격전지였다. 서해로 진출하려는 왜군이나, 왜군 본거지인 부산을 되찾으려는 조선 수군이나 진해 앞바다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592년 5월7일 거제 옥포에서 벌인 첫 전투(옥포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달아나는 왜군을 진해 앞바다까지 쫓아가 왜선 5척을 격침(합포해전)시키고 회군했다. 같은 해 7월9일 한산도해전에서 또다시 대승리를 거뒀을 때도 조선 수군은 진해 안골포까지 왜군을 쫓아가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철수(안골포해전)했다. 조선 수군은 다음해 3월3일부터 4월3일까지 한달 동안 진해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격파하기 위해 7차례나 출격(웅포해전)했다.
진해의 군사적 중요성은 현대에 들어 더욱 커져, 일제강점기 일본은 진해에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해방 직후엔 미군이 진해를 군항으로 이용했고, 현재 우리 국군 역시 진해에 해군기지를 두고 있다. 벚꽃 만발한 봄마다 열리는 진해군항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고니시를 중심으로 그의 사위이자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 여러 장수들은 진해에 웅천왜성, 안골왜성, 명동왜성, 자마왜성 등을 쌓아 조선 수군을 견제했다.
왜군, 조·명 연합군과 의병에 밀려
진해를 제2거점 삼아 웅천왜성 축성
본성곽은 예전의 웅장·정교함 여전
조선인 포로소녀 ‘수란’ 망향가 간직
■ 왜군 제2거점, 웅천왜성
웅천왜성은 해발 184m 진해 남산 꼭대기에 있다. 성벽 둘레 1250m에 면적 1만7930㎡로, 전체 왜성 가운데 울산 서생포왜성 다음으로 크다. 웅천왜성은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 등과 육로와 해로 모두 연락하기 좋은 위치에 있으며, 일본으로 철수하기에도 좋은 위치이다.
왜군은 이곳을 부산 다음의 제2거점으로 삼았다.
웅천만과 와성만 사이 바다로 길쭉하게 뻗은 남산은 3개의 봉우리로 이뤄져 있는데,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차례대로 제포진성, 제포왜관, 웅천왜성이 자리잡고 있다. 제포진성에서 조금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평지에 웅천읍성이 있다. 웅천읍성에서 웅천왜관까지는 직선거리로 2㎞도
떨어져 있지 않다.
네가지 시설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것은 제포왜관이다. 세종 원년(1419년) 쓰시마 정벌로 모든 왜관이 폐쇄됐다가, 세종 5년(1423년) 제포(내이포)와 부산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세종 8년(1426년) 울산 염포가 추가 지정됨에 따라 삼포가 정착됐다. 제포왜관은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이후 다른 왜관들이 폐쇄된 이후에도 유지되다 명종 2년(1547년) 폐쇄됐다. 제포왜관은 삼포 왜관 가운데 가장 번성했던 곳으로 한창 때는 이곳과 주변 왜인촌에 사는 왜인이 25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제포왜관 터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굴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신항 물류를 위한 도로 건설로 훼손될 처지에 놓여있다.
웅천읍성은 세종 16년(1434년)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와 제포왜관의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됐다. 하지만 삼포왜란 때는 왜인들에게 함락돼 동문이 불탔고, 임란 때는 왜군에게 함락돼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됐다. 성벽 둘레에는 폭 4m가량의 해자가 있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4차례 조사가 이뤄졌는데, 적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바닥에 박아놓은 나무말뚝(목익)과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나무다리(도개교)가 해자에서 확인됐다. 웅천읍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현재 동문인 견룡문과 주변 성벽이 복원된 상태이다. 경남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돼 있다.
제포진성은 제포왜관의 왜인들이 무단 이주하거나 웅천읍성에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위해, 세종 19년(1437년) 합포에 있던 해군기지인 수군첨절제사영을 이곳으로 옮겨오며 쌓은 것이다. 하지만 임란 때 왜군에게 점령됐고, 성벽 돌은 웅천왜성을 쌓는 데 사용됐다. 이 때문에 애초 성벽 둘레가 1377m에 이르렀으나, 현재 남은 것은 100여m에 불과하다.
제포성지는 경남도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 곳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머지 대부분 지역은 밭으로 사용돼 성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하기도 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부산에 상륙해 다음날 웅천왜성에 와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 왜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사목활동을 폈다.
웅천왜성 인근엔 세스페데스 신부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엔 “세스페데스는 스페인 사람으로 1593년 12월27일 우리나라 땅을 처음 밟은 서양인이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였으며 임진왜란 때 이곳 웅천포를 거쳐 이 땅에 들어왔고 일년 가량 머물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한국 방문은 1653년 8월 제주도에 표류되어 들어왔던 하멜(네덜란드 사람)보다 60년이나 앞선 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 비는 스페인 조각가 마누엘 모란떼의 작품으로, 1993년 세스페데스 신부의 방한 400주년을 기념해 그의 고향인 스페인 똘레도의 비야누에바 데 알까르대떼 시민들이 헌정한 것이다.
고니시는 또 일본으로 끌고 간 조선인 포로 상당수를 천주교 신자로 만들었다. 오타 줄리아도 이 가운데 한명이다. 그녀의 조선 이름, 생몰연도, 고향 등은 알 수 없으나, 일본에 끌려가서 고니시 유키나가 부인의 시녀로 지내다, 1596년 5월 일본에서 활동하던 베드로 모레홍(Petro Morejon)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 1600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처형된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부인의 시녀가 됐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인 것이 발각됐으나 끝내 배교를 거부해 40여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일본에서 생을 마감했다.
오타 줄리아는 1960년대 이후 소설, 시, 영화, 뮤지컬, 축제 등을 통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로는 모리 레이코의 <삼채의 여자> 외에도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 후데우치 유키코(筆內幸子)의 <오타 줄리아의 생애>, 하라다 고사쿠(原田耕作)의 <오타 줄리아>, 다니 신스케(谷眞介)의 <주리아 오타>, 아라야마 도오루(荒山徹)의 <사랑 슬픔을 넘어서>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표성흠의 <소설 오다 쥬리아> 등이 있다. 또 오타 줄리아가 천주교 배교를 거부해 유배생활을 했던 도쿄 남쪽 이즈제도의 고즈시마에선
1970년부터 해마다 5월 그녀를 기리는 ‘줄리아 축제’를 열고 있다.
고니시는 1595년 2월 웅천왜성에서 명나라 유격장 진운홍과 강화교섭을 시도했는데, 당시 접반관으로서 진운홍을 수행했던 이시발은 “성은 바다를 메우듯 조성되었고 선착장은 밤하늘
별처럼 줄을 잇고 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도 웅천왜성에 도착한 직후 일본의 포르투갈인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에게 보낸 편지에서 “웅천성은 난공불락으로 조만간 거대한 성벽과 망루와 치성을 가진 대단한 공사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아우구스티뉴(고니시 유키나가의 세례명) 휘하의 모든 중신과 병사, 동맹자, 종속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매우 잘 지은 넓은 저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의 저택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라고
웅천왜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소개했다.
하지만 성의 웅장함과 달리 웅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군의 처지는 매우 곤궁했다. 조선 수군이 남해안 제해권을 철저히 틀어쥐고 있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사실상 조선 수군과의 맞대결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혀 농성전으로 버텼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에게 두번째 보낸 편지에서 “굶주림, 추위, 질병 등 일본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고통을 겪고있는 이들 가톨릭교도들의 고난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관백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준다 해도 이곳에 도착하는 양은 실로 보잘 것 없어서, 전군을 먹여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일본에서 지원은 이미 중단된지 오래이며, 최근 2개월 동안은 도착한 배도 없습니다”라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웅천왜성은 남산에 있기 때문에 남산왜성이라고도 불리며, 경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돼 있다. 부산신항 건설에 따른 대규모 매립으로 지금은 육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당시에는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해 있었다. 현재 성곽은 여러곳 허물어졌지만, 본성곽은 아직도 예전의 웅장함과 정교함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420년 전 만들어진 돌계단은 밟고 뛰어도 전혀 흔들림 없이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 바다로 뻗은 성곽 끝부분은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과 경남 김해시를 잇는 해상교량인 남문대교의 허리부분과 맞닿을 듯 인접해 있다. 이 때문에 현재 공사가 한창인 남문대교는 설계 과정에서 웅천왜성을 피해 선형을 살짝 틀었다.
안골왜성은 왜군의 해군기지 구실
부산 길목 가덕수로 방어 요충지
일제, 고적으로 지정·관리하기도
제포왜관터, 도로건설로 훼손위기
■ 왜군 해군기지, 안골왜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웅천왜성을 쌓을 때,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은 해발 100m의 동망산 꼭대기에 안골왜성을 쌓았다. 이들은 왜군 수군을 대표하는 장수들로,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조선 수군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로 삼기 위해 안골왜성을 쌓은 것이다.
왜군은 안골왜성을 쌓을 때 인근에 있던 조선 수군기지인 안골포진성의 성벽 돌을 가져다 썼다. 안골포진성 서쪽 성벽 일부는 아예 안골왜성의 성벽으로 이용됐다. 안골포진성은 성종 21년(1490년) 건설됐다. 앞서 이곳엔 세조 8년(1462년) 김해 가망산에 있던 만호진이 옮겨와 주둔해 있었다. 하지만 임란 때 제포진성처럼 왜군에 함락됐다.
안골왜성은 웅동만을 사이에 두고 웅천왜성과 마주보며, 부산의 길목인 가덕수로를 지키는 구실을 했다. 현재 가덕수로는 부산신항 건설로 매립돼 대부분 메워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안골왜성을 고적 ‘웅천안골리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현재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로 지정돼 있다.
명동왜성은 웅천왜성의 지성으로, 1593년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鎭信)가 진해 명동마을 주변 구릉에 쌓고, 소 요시토시가 주둔했다. 마쓰우라는 일본 규슈지역에 있던 히라도번의 번주로, 고니시가 사령관으로 있던 왜군 제1군에 소속돼 있었다.
명동왜성은 진해만 동쪽과 거제만 북쪽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크게 4개의 성곽으로 이뤄져 있다. 명동마을 앞 바다에 접한 나즈막한 구릉에 성곽이 하나 있고, 명동마을 뒷산인 성실봉 꼭대기에 또 성곽이 하나 있다. 성실봉 꼭대기 부근에 외성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2개 더 있다. 명동마을 앞 구릉에 있는 성곽과 성실봉 꼭대기에 있는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축성됐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성곽이 주 성곽인지도 불명확하다.
성실봉 꼭대기의 성곽은 숲에 파묻혀 있지만 형태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성곽 주변 곳곳에서 부서진 기와와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깬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나 명동마을 앞 구릉에 있는 성곽은 닭장과 채소밭으로 사용되면서 훼손 정도가 심한 상태이다. 두 성곽 어디에서든 진해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매립돼 육지로 변모한 부산신항, 서쪽으로는 거제가 훤히 보인다.
웅천왜성의 또다른 지성인 자마왜성은 와성만 북쪽 해발 240.7m인 자마산 꼭대기에 세워졌다. 애초 이곳엔 삼국시대 때부터 산성이 있었는데, 소 요시토시가 기존 산성을 일부 고쳐 왜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거진 숲에 파묻혀 성곽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태이지만, 산 위에서는 지금도 조선식 석담이 발견된다. 자마왜성 터에서는 바다는 물론 웅천읍성 지역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웅천왜성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211-1.
-안골왜성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
-명동왜성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1-1.
-자마왜성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산15.
-주변 관광지 : 웅천읍성, 진해해양공원, 진해드림파크 등.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도움말 :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15015.html